처음 블로그를 만들때 3년동안 키예프에 살면서 생긴 일이나 정보들을 나누자 라는 마음으로 개장했는데 결국 내 여행기만 남기는게 주 목적이 된듯하다.
여튼 이번에도 또!! 여행을 갔다. 기간은 5월 부활절, 메이데이, 승전기념일 연휴가 있는 4월 28일부터 5월 10일까지 총 13일. 여행 루트는 좀 길다.
리투아니아(빌뉴스, 트라카이) – 라트비아(리가, 유르말라) – 에스토니아(탈린) – 핀란드(헬싱키) – 스웨덴(스톡홀름) –덴마크 (오덴세, 실랜드 섬 전역) 즉 빌뉴스 –in, 코펜하겐 –out 되겠다.
(빌뉴스 대성당)
이 걸 몇번이나 대답해줬는지 모르겠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선생들도 다 물어본다. 이번 여행은 어디 어디 갔다온거야. 그때마다 이걸 반복해서 들려줬다. 이건 뭐 어떻게 종이에 적어다 두고 보여줘야겠다.
(빌뉴스 국립극장의 조각상)
여행을 떠니기 전날 나는 밤을 샜었다. 설계 과제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하다보면 또 생각나고 또 추가할게 생기고 하다보니 밤을 샜다. 아침 6시까지 완성을 시키고 한 1시간 반 정도 잔 다음에 설계도 프린트를 하러 갔다. 비행기는 오후 2시 출발. 그날따라 왜 프린트 하는 곳은 컴퓨터가 말썽일까. A1 3장을 프린트 해야 하는데 두번째 종이에서 컴이 고장이 났다. (결과적으로는 내 설계도에 너무 잔 그림이 많아서 처리 속도가 늦어진게 주 원인이긴 했다만) 결국 10반쯤 되서 교수에게 설계도를 제출했다. 역시나 오늘 수업에도 나만 왔다. 교수는 3명인데 점수를 주는 단계는 언제나 같이 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경우 최소 2명은 있어야 한다. 다행이 2명이 있었다. 그것도 원로로 평가받는 교수 한명과 그 부교수.
(트라카이의 성)
이 교수들은 비행기 시간이 가까워 오는 내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세월아 내월아 지들 수다만 떨고 있다. 근데 결국 날 보고 그냥 생각을 좀 하더니 (내 과제는 정말 대충 보고) 점수를 후하게 줬다. 그리고 다음주 수업때 다음 설계할꺼 미리 준비해서 오란다.
-어, 저 오늘 떠나고 2주 후에나 오는데요.
-어디가는데?
-그러니까…. (저 위에 써둔거 다시 반복했다.)
-많이 돌아다니네. 가서 그럼 사진 많이 찍어서 애들이랑 같이 보게 준비해!
그렇게 나는 이번 여행에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도시들마다 뛰어난 쇼핑 센터들의 외관 사진과 내부 구조를 구해와야 했던 것이다.
(리가 올드타운의 맞은편)
키에프에서 산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이나라 항공을 타고 여행을 하는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에로스비트를 타고 처음 출발도시로 가게됬다. 학교 과제를 제출하고 부랴부랴 집에와서 택시를 부르고 여행베낭을 메고 공항으로 갔다. 다행이 시간적으로는 여유가 있게 도착을 했고 나는 짐을 보내기 위해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서 베낭을 컨베어벨트 위에 올려놓고 여권을 주면서 말했다.
-코펜하겐 비행기요.
-예. (자판두둘이는 소리) 비자 있으세요?
-한국인은 유럽여행에 비자 필요 없어요. (아 왠지 모를 뿌듯함)
-예…. 어 근데 명단에 손님 이름이 없네요. 표 좀 보여주시겠어요?
-어? 정말요? 잠깐만요. (부시럭부시럭) 여기요.
-감사합니다. 저기……. 코펜하겐이 아니라 빌뉴스 가시는건데요.
-아!!!!!!!!!!!!!!!!!!!!!!!!!!!! 빌뉴스 였구나!!!!!!!!!!!!!!! 예!!! 빌뉴스요! 돌아오는게 코펜하겐이지!!!!
난 이렇게 처음 떠나는 순간부터 한국인의 자랑스러움을 알렸다.
(리가의 구시가지)
아에로스비트의 빌뉴스행 비행기는 원래 시간보다 약 50분 정도 늦게 출발했다. 언제나 그렇듯 ‘기술적인 문제’로 출발이 늦어졌다. 그리고 바로 기내식이 나왔다. 샌드위치와 음료. 나는 커피와 물을 부탁했다. 커피는 일반적인 인스턴트 커피 였고 샌드위치는 정말 이런게 다있어 할 정도로 맛이 없었다. 우선 빵은 가루가 되어 다 날랐다. 그리고 안에 들어간 버터같은 마요네즈는 너무 많았고 아채라곤 배추(우리가 김치로 먹는 그 배추다!) 한장과 샤프심 두께의 햄 한장이었다. 옆에 앉아계신 미국인 할머니는 한 두입 먹고 오렌지 주스만 마셨다. 근데 나는 점심도 안먹고 학교에서 바로 왔더니 배고파서 모조리 먹었다. 다 먹고 흘린 빵가루(빵이 이상해서 엄청나게 많았다.)를 깨긋하게 물티슈로 쓸어담아 샌드위치 껍데기에 담았더니 옆에 앉아있던 미국인 할머니가 날 이상하게 처다본다. 뭘 잘못한거지?
(리가의 유명한 세형제.)
비행기에서 나는 ‘아 이제 영어만 사용하게 되겠구나.’ 생각하고 맘의 준비를 했다. 러시아어는 더 이상 쓸 일이 없군. 하며 나는 빌뉴스 공항에 내렸다. 비행기에서 공항으로 가서 여권검사하는곳에 줄을 섰다. 헐 어찌 된 일인가 내 앞에 있는 아줌마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공항직원도 러시아어로 대답을 다 해줬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맘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던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러시아어가 너무나도 쉽게 통용되는것에. 공항을 빠져나와 환전을 약간만 한 뒤(공항은 언제나 환율이 안좋아요! 그러니까 차비 정도만 환전하세요!) 새내로 들어가는 기차를 타기위해 역으로 갔다. 거기에 적혀 있는 안내문은 모두 리투아니아어, 러시아어, 영어였다.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이거 러시아어를 읽어야 하는 것인가 영어를 읽어야 하는것인가. 그리고 시내 가게에서 울려퍼지는 유행곡들은 러시아노래 였으며 사람들의 일상적인 대화에도 러시아어가 많이 쓰였다.
나중에 빌뉴스에서 리가로 가는 버스 안에서 약간의 기대를 가지고 대기실에 앉아 계시던 아주머니께 물어보았다. 리가도 여기만큼 러시아어가 많이 통하나요? 아줌마는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더니 ‘거긴 여기보다 더 해!!’ 한다. 이래서 발트 3국의 여행은 쉽게 러시아어로 블라블라 거리면서 다녔다.
(러시아인들의 꿈의 휴양지 유르말라)
빌뉴스에서의 만난 사람들:
1)술취한 현지 아저씨
이 아저씨의 이름은 뭐라고 4글자 였는데 까먹었다. 특징적인것은 이미 유스호스텔에 들어왔을때 부터 술에 취해 들어오셨고 나에게도 자신의 품 안에서 꼬냑을 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다. 직업은 통역 & 가이드. 덕분에 트라카이라는 지역을 알게 되었고 다음날 아침일찍 트라카이를 향해 갔다. 비록 두모금 이지만 공짜술을 얻어 현지인들에게 공짜 술을 얻어먀셔본건 처음이다.
2)스페인 청년 다니엘
트라카이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만났다. 그의 복장은 누가봐도 ‘여행자’였다. 머리는 한 4일은 안 감은듯한 떡진 머리와 인도풍의 셔츠에 묵직해 보이는 베낭을 메고 있었다. 그는 내 옆자리에 앉아서 트라카이까지 갔다. 내려서 같이 버스터미널에 있는 지도를 보고 친하게 되서 계속 트라카이에 이어 그날 하루종일 같이 다녔다. 그 무거운 짐을 지고도 잘 다녔는데 덕분에 빌뉴스와 트라카이에서는 내 얼굴이 들어간 사진들이 남아 있다. 다니엘은 폴란드에서 교환학생으로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인데 이번 여행은 모두 카우치서핑으로 숙소를 찾게되어서 돈이 적게 들어간다고 한다. 그리고 나도 나중에 키예프 오게 되면 연락달라고 했다. 바르셀로나 산다고 했으니까 나도 언제 스페인 가게 될 일이 있으면 신세좀 져야지. (PS. 이번 여름 한 7월 경에 키예프에 온단다. 그래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ㅎ)
(해운회사 탈링크의 사무실이었던걸로 기억한다. 탈린)
빌뉴스는 정말 작은 도시다. 구 시가지는 정말 거짓말 안하고 2시간이면 들어갈 곳(박물관이나 미술관제외) 다 들어가고도 여유있게 구경할 수 있다. 얼마나 할 일이 없었으면 일찍 들어와서 유스호스텔에서 만난 아저씨와 술이나 한잔씩 하고 있었겠는가. 하지만 빌뉴스는 이번 여행에서 가장 물가가 싼 곳이었고 편안함을 주는 곳 이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수출한 상품들이 제일 많은 곳이었다! 빌뉴스의 슈퍼마켓에서 보는 ‘추막’케챱의 위풍당당함이란!
(탈린의 유명한 교회)
리가로 가는 버스는 저녁 9시 반에 출발해 약 2시 반쯤 도착하는 정말 어정쩡한 시간대의 버스였다. 나는 숙박비를 아끼겠다는 일념하에 이 버스를 탓고 이것은 정말 저주스런 날의 시작이었다. 리가에 도착해서 우선 한 30분 정도 버스 터미널을 돌아다니면서 탈린으로 가는 버스 시간과 가격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슬슬 구시가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때가 약 3시가 좀 넘었을때다. 그리고 터미널을 나서는 그 순간 5월의 기온이라고는 할 수 없는 바람이 내 싸대기를 후려쳤다. 난 구 시가지를 향해 걸어갔다. 근데 리가는 새벽3시에도 잠을 안자고 있었다! 구시가지에 밀집해 있는 술집들과 클럽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음악을 쾅쾅 틀어놓고 있었다. –뭐야… 이사람들… 무서워…
근데 오늘은 금요일! 그 유명한 후라이데이 나이트! 나는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저기서 술취한 사람들의 괴성(포효)가 들렸다.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가방을 꼭 안고서 선잡을 자려는데! 너무추웠다. 이건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기온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옷을 최대한 으로 입고 있어도 빈약했고 잠은 오지 않았다. 돈도 없으니 카페 같은데 앉아 있지도 못하고 그저 해가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은 정말 추운 날이었어…….
드디어 해가 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날씨는 춥고 들어가 있을 곳도 없고 돈도 없다. 그런데! 6시에 문을 여는 성당이 있었다. 토요일 새벽 미사라니. 여튼 나는 그 성당 앞 공원에서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는 순간 들어갔다. 따듯한 성당에서 마음의 안식을 되찾았다.
환전을 해 보니 라트비아의 돈은 엄청나게 비싼돈이었다. 내가 볼때 유럽에서 제일 비싼 돈이 영국 파운드가 아니라 라트비아 라트인거 같다. 100달러를 바꾸면 한 45라트를 준다. 절반 이하로 가치가 떨어지니 이건 1센트를 써도 손이 후덜덜 떨린다. 1라트는 한국돈으로 약 2400원돈 된다. 그만큼 가격이 싸긴 하지만 단위 자체가 커서 동전하나하나 소중하게 썼다. 에스토니아와 핀란드는 유로를 썼고 스웨덴과 덴마크는 각자 자기네 돈을 쓰긴 하지만 둘다 명칭은 크로너 이다.
이렇게 라트가 비싸니 라트비아는 수입품이 많았다. 물론 나라가 작다보니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생산품이 많이 없을것으로 생각이 되지만 높은 라트 가격도 자체생산 보다는 수입하는 방향으로 많이 가도록 이끈것 같다. 그래서 좋은점은 비록 이나라가 뭘로 벌어 먹고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는 모습은 서유럽을 따라 잡은 모양이다. 서유럽제품들이 바로바로 수입이 되니 사람들은 당장 품질 좋은 제품을 사용하니 특별하게 불만은 없어 보인다.
리가를 포함한 발트3국의 도시들은 러시아지배를 당하기 이전부터 생활수준이 훨신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수준이 못하는 러시아가 힘으로 땅을 점령하자 다른 어느 지역보다 독립&민족주의 운동이 심한 지역이었고 소련으로 병합이 되고 나서 부터도 러시아는 특별히 이 지역에 더 신경을 써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가 이 동네는 다른 구 소련지역에 비해 훨신 잘 사는 모양새다.
리가도 빌뉴스와 비슷하게 올드시티 자체는 크지 않았다. 여기도 다 둘러 보니 한 4시간 정도. 특히나 나는 새벽부터 둘러봤으니 이놈의 도시에서 진정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유르말라라는 리가에서 약 30분 떨어진 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유르말라는 발틱해에 접해 있는 유명한 여름 휴양지이다. 특히나 러시아 인들에게는 가깝고 좋은 최고의 휴양지였다. 지금도 러시아에서 매년 주최하는 ‘노바야 볼나(New Wave)’라는 국제 가요콘테스트는 이곳 유르말라에서 여름에 열린다. 하지만 내가 갔을때는 역시나 아직 추웠다. 5월에 북해에 서서 겨울바람을 느끼고 왔다. 나는 세찬 바람때문에 흘리는 눈물을 닦으며 시내 중심지를 둘러보고 다시 리가로 돌아왔다.
정말 여기서 부터는 리가에서 할 일이 없었다. 무거운 가방 메고 백화점 돌아다니기도 뭣하고 시내 중심 광장에서 앉아서 사람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어딜 더 돌아다니고 싶어도 어깨를 내리 누르는 가방덕분에 금방 잊혀졌다. 그리고 밤이 오자 슬렁슬렁 버스터미널에서 과자한봉지와 전자책을 들고 탈린으로 향하는 버스가 오길 기다렸다.
(헬싱키의 대표 교회 외관과 같이 내부도 정말 깔끔했다. 너무 깔끔해서 약간의 조각상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탈린버스터미널에 도착한건 약 6시 쯤이었다. 너무 추워서 좀 대합실에서 기다렸다 가려고 있었는데 대합실은 이미 콩나물 시루였다. 그 옆 계단에 앉아 있는 동남아 여행객을 발견하고 나는 탈린에서 지낼만한 숙소를 물어보았다. 근데 지들은 당일코스로 온거라 탈린은 숙소를 안 알아보고 왔단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어디서 왔느냐 물어봐서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눈빛이 변한다. 되게 부러운 눈빛과 함께 무엇인가 말을 더 하고 싶은데 떨려 하는 듯한 눈빛? (이거 순간의 눈빛을 어떻게 설명 할 길이 없네.) 그 사람들에게 한국어 ‘안녕’을 가르치고 있는데 저 대합실에 누가봐도 한국사람인 여자분 2명이 내 앞을 지나갔다. 나는 얼른 멈춰세우고 숙소를 물어보았다. 자기네들도 지금 찾으러 간단다. 그래서 동남아 여행객들을 버리고 쭐래쭐래 따라 갔다.
터미널을 나오자 세찬 바닷바람이 내 싸대기를 때린다. 지도상으로는 절대 먼 거리가 아닐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추위를 못 견디고 우리는 그냥 트램을 타기로 했다. 우선 역시나 그렇듯 올드시티로 갔다.
탈린에 도착한 그 날은 5월 1일 전 세계적은 공휴일이었다. 그래서 올드타운 안에 있는 유스호스텔은 모두 풀로 가득 찬 상태. 그중 한 유스호스텔에서 알려준 곳으로 가기로 했다. 지도에 16유로 라고 적어둬서 아 여기는 방 하나에 16유로 이구나 하면서 셋이 갔는데 호스텔 이름이 16유로 였다. 왠지 모르게 배신당한 느낌. 나는 도미토리에 자리가 있어서 그곳으로 갔고 여자분 두분은 더블룸(이게 16유로였다.)을 드디어 구했다. 근데 우리는 이미 방을 구하러 돈 올드타운을 둘러본 이후라 이젠 나도 할 일이 없었다…….
샤워를 간단하게 하고 나는 탈린 항으로 배표를 사러 갔다. 나는 탈린-헬싱키-스톡홀름를 배로 가게 된다. 그리고 이 라인을 다 다니는 회사는 바이킹 라인과 실야링크 두 회사였다. 그런데 분명 내가 헬싱키-스톡홀름 배표를 인터넷으로 알아봤을때 약 100유로(바이킹 기준)약간 넘었던걸로 알고 있는데 탈린에서 헬싱키를 거처 스톡홀름으로 가는 배표가 현지에서 알아보니 52유로 였다. 실야링크는 더 싸서 47유로였나 했다. 어떻게 배를 한번 더 타는데 오히려 가격이 다운이 되지? 패키지 가격이라 저렴하다고 하는데 정말 이해할수 없는 일이 었다. 여튼 나는 싸게 잘 갔다지만.
(헬싱키의 유명한 건축가 알바르 알토가 만든 핀란디아 홀)
아메리카노를 모르는 바리스타
커피를 워낙에 좋아하다 보니 여행을 다니면서도 커피를 많이 마신다. 특히나 이 북유럽은 일인당 커피 소비량이 세계 최고 일 정도로(핀란드가 1위다) 커피를 많이 마시는 나라들이라 얼마나 좋은 커피를 마실까 하는 궁금함에 항상 커피를 사 마셨다. 그런데 탈린의 커피 키오스크에서 황당한 일이 있었다.
-아메리카노 한잔 주세요.
-예? 에스프레소요?
-아니요. 아메리카노여.
-에스프레소여?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가 뭐에요?
엥? 나는 그 말을 듣고 눈만 깜박 거리며 한 2초간 그여자를 바라봤다.
-엄…………. 그러니까……. 큰 컵에 우선 에스프레소를 추출하구요.
그 여자는 열심히 따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뜨거운 물을 가득 부어 주세요.
그 바리스타도 나를 한 2초간 깜박이며 보다가 뜨거운 물을 부어준다.
-그게 아메리카노에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처음으로 아메리카노 라는 단어가 세계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북유럽 사람들의 커피 습관을 보니 여기 사람들은 에스프레소는 사용을 잘 안하고 드립커피를 많이 끓여서 보온병 같은데 보관해서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카페에 가면 에스프레소 머쉰들이 다 있고 에스프레소를 포함한 여러 커피들을 만들어 마시는데 기본적으로 가정에서 마시는 커피는 일반 드립커피이며 그냥 커피라고 하지 따로 아메리카노라고 하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배를 타기 위해 항구로 가는 길에 다시 그 키오스크에서 커피를 샀다. 바리스타는 밝에 웃으면서 ‘아메리카노여?’하면서 물어본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고 따듯한 커피를 사서 항구로 향했다.
(이 배는 헬싱키에서 스톡홀름으로 가는 배)
재미있네요. 앞으로의 여행기가 기대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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